이야기 가득한 그 사찰, 봉국사로
우리나라에는 천 년 고찰이 많다. 우리나라에서 불교가 가장 성행했던 것은 통일신라시대. 이 때를 기점으로 전국 곳곳에 세워지기 시작한 사찰들이 지금까지도 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서 있으니, 천 년의 역사가 가진 그 이야기들이야 오죽하랴. 천여 년의 세월을 담아 곱게 낡은 건물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일과 이 오래된 사찰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 일이 여행을 더욱 맛깔나게 만들어 줄 테니, 성남시에 위치한 천 년 고찰, 봉국사로 가 보자.
아름답게 빛나네, 대광명전이 있는 봉국사
봉국사의 대광명전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01호이다.
앞서 신라의 이야기를 했었으나, 봉국사가 창건된 것은 그보다 약간의 시간이 더 지난 뒤의 일이다. 봉국사의 창건연대는 1028년, 고려 현종 19년의 일이니 천 살의 나이를 채우려면 십여 년이 남은 셈이다. 그러나 도무지 피부로 와 닿지 않는 천 년의 세월 앞에 십 년이 중요할까. 세월은 흐르고 흘러, 봉국사를 둘러싼 풍경은 콘크리트 건물들로 바뀌었으나 예나 지금이나 봉국사는 밤낮없이 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찾아오는 이들을 반기고 있다.
봉국사에는 대광명전과 삼성각, 심검당, 일주문, 천왕문, 범종루 등이 남아 있는데 그 중 대광명전은 봉국사 안에서도 찬찬히 시간을 들여 둘러보아야 하는 건물이다. 앞면 3칸, 옆면 3칸. 맞배지붕을 가진 이 대광명전 안에는 아름다운 닫집이 있다. 닫집이란 불전 안에 세운 작은 집을 이르는 말. 닫집 자체가 희귀한 것은 아니나, 봉국사의 닫집은 그 중에서도 아름답고 독특하기로 손꼽힌다. 항아리를 닮은 초석에는 연꽃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이와 같은 형식은 전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것이므로 이 또한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봉국사 대광명전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01호로 지정되어 있다는 점도 참고해 두자.
봉국사, 두 공주의 넋을 위로하다
봉국사에는 두 어린 공주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고려 시대에 건립되었던 봉국사는 수차례 폐사의 위기를 맞았었고, 또 수차례 중건되어 폐사의 위기를 극복하였다. 현종 15년에 이르러서도 봉국사가 중창된 일이 있었는데, 이 때 얽힌 이야기가 흥미롭다. 현종에게는 어릴 때 세상을 떠난 두 공주가 있었는데, 이 두 공주의 이름은 명선과 명혜였다 한다. 명혜공주가 마마로 죽은 뒤 3개월, 동생의 뒤를 잇듯 명선공주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 이듬해 현종이 두 공주의 명복을 빌기 위해 공주의 능 근처에 위치한 봉국사를 중창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고양시의 서삼릉으로 명선, 명혜공주의 묘가 옮겨졌으나, 봉국사는 두 공주의 넋을 위로하는 원찰의 역할을 했었다. 봉국사의 아담하고 산뜻한 경관은 어린 두 공주의 넋이 봉국사를 어루만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만해를 이은 유일한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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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광명전 앞 포대화상의 웃음이 정겹다.2
천 년 고찰의 범종루가 속세를 내다 보고 있다.봉국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만해 한용운 선생의 이야기가 빠질 수 있을까. 한국의 근대 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인 만해. 그는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강원 인제의 백담사로 출가하였으니, 성남의 봉국사는 만해 한용운 선생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봉국사는 만해의 단 하나뿐인 상좌, 춘성스님이 입적한 곳이다. 춘성스님이 만해의 제자가 된 것은 13세 때의 일. 만해의 어린 제자로 불가의 생활을 시작하여 무소유 정신에 입각한 평생을 지내 온 그는 1992년에 이르러 노태우 전 대통령이 4천 3백여 평의 부지에 만해 기념관을 건립하고 묘소를 이장할 것을 지시하자 이에 반발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속세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얻었던 인물로도 유명한 춘성스님. 대광명전 앞 포대화상의 너털웃음과 그 품에 안긴 아이들의 모습에서 춘성스님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면 영장산 자락에 위치한 천 년 고찰로의 나들이는 퍽 성공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