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은 아무 말이 없다. 제천 가는 버스에 올라탄 후로 둘은 아무 말이 없다. 남자는 초조하게 손가락만 주기적으로 까딱하고 있었고 여자는 창밖만 내다볼 뿐이었다. 둘은 아무 말이 없지만, 머릿속으로 스쳐 가는 생각들은 같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딜 간다고? 유학?”
“그렇게 됐어.”
“그렇게 됐다니, 무슨 말이 그래? 그럼 나는?”
그럼 나는. 여자는 자신을 책임져 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다는 남자의 말에 나는 너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냐를 묻는 것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행복할 것 같냐고 물었을 때.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이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둘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고 행복한 둘만의 미래를 머릿속으로 수만 번도 더 그려왔었다. 이제 그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한 여자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사실 여자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그가 돌연 선택한 유학길이 아니라 ‘같이 가자’라는 이 네 글자가 남자의 입에서 나오지 않음이었다.
여자는 차마 ‘나도 같이 가면 안 돼?’라고 물을 수 없었다. 남자의 눈빛은 이미 고요했고 적막하기까지 했다. 여자는 같이 가자는 말을 잊은 건 아닌가 생각했지만 아무런 기대를 바랄 수 없는 눈빛이었다. 소리를 지르고 울어보아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여자도 알았다.
“곧 도착이야.”
긴 침묵을 깬 것은 여자였다. 여자의 말이 끝나고 난 뒤 정확히 2분 뒤 버스는 정차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좀 더 근사한 곳을 가지 왜 하필 여기냐고 했고 여자는 대답이 없었다.
암묵적인 이별상태의 남녀가 마지막이라고 해서 굳이 근사한 곳에 갈 필요가 있을까? 애써 낭만적인 분위기로라도 서로의 앞날을 축복해주어야 하나 생각했다. 사실 둘의 관계가 정말 좋았을 때 분위기 따위는 상관이 없었다. 그곳이 어디든 그저 둘이 있는 곳 그거면 좋았다.
여자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차분히 그리고 애써 아무런 원망도 섞여 있지 않은 듯 이야기를 하려니 목소리가 먹먹했다.
“옛날 아주 옛날에 어떤 도령이 있었어. 선비였던 도령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중이었지. 날이 저물고 어떤 농가에서 하룻밤을 지새우는데 아주 아름다운 낭자와 마주하게 된 거야. 그런데 과거를 보러 가야 했던 도령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고 낭자를 떠나게 되었지. 아무리 기다려도 도령이 돌아오지 않게 결국 낭자는 죽고 말았대.
하지만 걱정마 나는 아주 잘 살 거니까.”
남자는 무심한 엷은 미소를 보였다. 왜 여자가 갑자기 이곳을 오자고 하였는지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남자가 말없이 여자의 손을 잡았다. 아주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기를 가지고 있었다.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마음과도 같았다. 아주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여자는 배가 고프다고 했고 둘은 근처 도토리묵 집으로 갔다. 남자는 또 겨우 도토리묵이 뭐냐고 했고 여자는 여전히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저 며칠 전 C와 만났던 일을 떠올린다. 남자가 왜 돌연 유학을 떠나기로 했는지 왜 여자에게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지 C의 입에서 듣게 되었다. 그리고는 남자에게 이곳을 오자고 한 것이다.
말캉말캉한 도토리묵이 동동주와 함께 나왔다. 남자가 여자에게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이별을 결심했던 것처럼 여자도 남자에게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남자를 보내주려는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웃고 있었고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고 있었다. 아주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표정으로.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예쁜 꽃도 금방 시들고 아끼던 보석들도 금세 싫증 나고 마는데. 아니, 영원할 것 같던 사랑도 마음이 바뀌는 건 한순간이라고들 하는데 과연 세상에 영원한 것은 과연.
모든 것이 변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 옛날부터 사람들은 춤과 노래를 즐겼으며 그곳에는 항상 술이 빠지지 않았다. 술의 신 디오니스소 시대부터.
2차도 모자라 3차까지 가자는 진호를 극구 뜯어말리느라 택시를 잡았다가 보내기를 세 번이나 반복했다.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줄지어 서 있는 가로수 나무에 헛구역질을 해대면서도 막무가내다. 연호는 만취한 진호의 모습이 놀랍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려니 하는 표정으로 그저 말없이 택시에 탑승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딱 한 잔만 더 하자니까. 엉? 딱 한잔만. 아니면 노래방 갈까? 너 우리 집에서 얻어간 포도 생각해봐 짜식. 근데 술 한 잔도 더 못해? 치사한 놈”
연호는 진호의 주사를 더는 들어줄 수 없다는 듯 가까스로 잡은 택시에 구겨 넣듯이 진호를 밀어 넣었다.
진호네는 과수원을 했다. 포도농사. 장마철이면 한 해 농사를 망칠까 가슴을 졸였으며 알이 실하지 않을까 상품성이 떨어지지 않을까 늘 부모님은 사서 걱정을 했다. 진호가 서울에 올라와 직장을 갖기 전까지 부모님을 도와 포도재배를 했다. 어린아이 만지듯 조심히 다루라는 부모님의 말에 조심스럽게 포도를 땄다. 가만히 포도를 본 진호는 포도껍질에 낀 흰 당분을 보고 연호를 떠올렸다. 연호의 혀에 낀 하얀 백태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연호는 유난히 진호네 포도를 좋아했다.
원래 포도껍질에 하얗게 낀 것이 맛있거든. 바로 당분이 많이 있다는 증거야. 이런 말을 하는 와중에도 진호는 연호의 혓바닥을 바라보았다. 분홍빛과 보랏빛이 적절히 섞인 혓바닥에 낀 하얀 것을.
몇 시간 전 진호는 문득 연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녁에 술 한 잔 하자는 것이다. 할 말이 있다고. 퇴근시간의 극심한 러시아워 때문에 연호는 약속장소에 30분 정도 지나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금요일임을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연호가 앉아있는 진호를 발견했을 때 이미 진호는 얼굴이 조금 붉어있었고 이미 술을 마시고 있는 상태였다.
“뭐야, 내가 조금 늦은 사이 혼자 시작한 거야?”
“그러길래 누가 늦게 오래? 약속시간도 안 지키고 말이야. 엉? 내가 클라이언트였다면 넌 꽝이야 인마. 알아? 클라이언트는 삼분도 안 기다려 준다고.”
“그래, 알았어. 근데 웬 와인이야? 너 포도 지긋지긋하다고 와인은 입에도 안 대던 애가?”
“그냥, 나 내려가서 살까 봐. 과수원 일이나 하고.”
“갑자기 왜?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은. 없었어. 그런 거.”
연호를 만나기 두 시간 전. 팀장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진호를 불렀다. 진호네가 과수원을 하고 있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이번 와인열차 기획에 담당으로 진호를 추천할 예정이라고 언지를 주었다. 월말에 인사고과가 있던 차에 팀장의 부름은 진호에게는 틀림없는 기회였다.
“김대리. 내가 자네 팍팍 밀어주고 있는 거 알지? 그래서 말인데…”
진호는 연호가 보고 싶어졌다. 팀장의 혓바닥에서 하얗게 낀 백태를 보아서일까.
거울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어느새 많이도 늙었다. 세월을 고스란히 견뎌온 자랑스러운 훈장들이 얼굴과 목 그리고 손 마디마디에 새겨져 있다. 그 옆에는 쌔액쌔액 숨소리를 내쉬며 늙어버린 주름처럼 꼬깃꼬깃한 옷가지를 가지런히 개고 있는 아내가 있다. 러닝셔츠와 사각팬티는 왜 함께 늙어버린걸까. 매번 아내가, 자식들이 새로 사다주는데 빨래를 개고 있는 아내를 바라볼 때면 빨랫감들이 항상 저렇게 볼품없이 축 늘어져있다.
“늙었네. 젊다고 으스대고 다닌 게 엊그제 같은데.”
“늙은 거 이제 알았어요? 아이고, 난 진즉에 알았는데. 영감도 참. 꿈도 야무지셔.”
“당신은 여전히 고와. 여전히 예쁘다고.”
“아이고, 영감이 오늘 왜이래? 무슨 바람이 들어서? 호호”
말은 저렇게 해도 빙그레 웃는다. 아내는 웃는 모습이 예쁘다. 눈이 반달모양으로 지어지며 눈가에 주름이 지어진다.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아내는 여전히 반달모양의 눈으로 나를 보며 웃는다.
내일 모레가 아내 생일이다. 아들이란 놈은 근사한 곳에서 밥을 먹이고 밥값을 계산하는 걸로 생일 선물을 대신할 테고 딸내미는 양 팔에 손주새끼들 품고 와 아들내미가 내는 밥을 내는 얻어먹고는 흰 돈 봉투를 건네며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이행할 것이다.
아내가 좋아하던 것이 무엇이 있었나 생각하니 번뜩하고 떠오르는 것이 없다. 무엇이 좋을까? 가지고 싶은 것이 있냐고 물어보려다 만다. 물어보아도 분명 돈으로 주라고 늙어빠진 소리를 할 것이다. 힌트를 좀 얻고자 딸내미에게 전화를 건다.
“나다. 내일 모레 네 엄마 생일인거 알지?”
“어, 아부지. 빨리 이야기 해. 지금 민성이 학원 데려다 주러 가야해.”
“네 엄마 생일 선물 말인데. 뭐가 좋겠냐?”
“선물? 무슨 선물? 엄마 선물? 다 늙어서 무슨 선물이래? 우리 아부지 로맨티스트였네?”
이것이 늙은이들은 뭐 감정도 없는 줄 아나보다.
“됐고. 여자들이 뭐 가지고 싶은지나 말해봐.”
“음. 아무래도 화장품이나 보석 아니겠어? 늙어도 여자는 여자라고 하는 거 몰라?”
“알았어. 끊어. 내일 모레 늦지 않게 와.”
늙어도 여자는 여자라고? 하기야 아내는 늘 얼굴에 여러 가지 화장품을 발랐다. 스킨, 로션까지는 알아들어도 당최 그 다음부터는 말해줘도 모르겠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화장품이 좋을까.
시내로 나오니 젊은이들의 혈기가 왕성하다. 번쩍이는 불빛에 소란스런 스피커 사이로 흘러나오는 소리들이 귀를 왕왕거리게 했다. 둘러보니 이곳저곳 죄다 젊은이들이 좋아할만한 것들뿐이다. 한 참을 화장품 가게 앞에 서성이니 마이크를 잡고 사람들을 끌어 모으던 여자가 할머님 드릴 선물 고르냐며 내 팔을 끌어당겨 가게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천천히 골라보라며 상큼한 미소를 남긴 여자는 다시 밖으로 나가더니 마이크에 대고 사람들을 불러보았다,
가게 안을 둘러보니 이것저것 화장품들이 많았다. 도대체 뭐가 이렇게 많은지. 이것저것 둘러보는데 사장처럼 보이는 여자가 말을 걸었다.
“사모님드릴 선물 고르시나봐요?”
“예. 허허 그런데 이거 뭐 봐도 모르겠네요.”
“이쪽으로 오시면 주름개선 그리고 피부미백에 좋은 제품들 많거든요? 한번 보세요. 이 제품은 저희 가게에서 가장 잘 파리는 제품인데요, 한 번 써보신 분들은 다시 쓰는 경우가 많아요.”
“음. 그래요? 잘 모르겠네요.”
“아, 그러시면. 이 제품 어떠세요? 머드로 만든 제품인데요. 이것도 인기가 좋아요. 부드러운 느낌이 강하고 촉촉해서 어머님들도 굉장히 좋아하시고요.”
머드라. 언젠가 아내가 얼굴에 희뿌연 것을 바른 기억이 난다. 아내는 팩이라고 했고 부드러운 것이 하고나면 촉촉해 진다고 했다.
아내에게 줄 선물이 손에 들려있다. 선물을 받을 아내를 떠올린다. 분명 뭐 하러 이런데 돈 쓰냐고 하겠지만 반달모양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어줄 것이다. 아내에게 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아무튼 노인네가 몸에 좋은 거라면 눈빛부터 달라지신다니까?”
“그러니까. 저렇게 몸 생각해서 다 어디다 쓰려고 그러나 몰라? 그때 봤어요? 삼계탕 나오는 날. 다들 한 그릇씩 배정 받는데 혼자 배부른데도 두 그릇, 세 그릇씩 먹는 거.”
급식 아주머니가 삼삼오오 모여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이 동네에서 이미 유명인사로 이름을 떨친 할아버지는 그저 몸에 좋은 것이라면 앞뒤를 가리지 않으셨다. 아들이 서울대학병원에서 의사로 있고 며느리가 약사라는데도 무엇이 할아버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더군다나 할아버지는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사람들이 말하기로 소위 자식농사 번지르르하게 지어놓고 왜 저러나 모른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꼭 교회에서 봉사하는 무료급식을 빼놓지 않고 찾아드셨고 마을회관에서 열리는 노인의료봉사에 가장먼저 줄을 서서 진료를 받았다. 그런 날이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할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아니, 아들이 의사인데 용돈을 안주나? 연락도 안하고 사는 거 아니야?”
“누가 아니래요? 꼭 아픈데도 없는데 의료봉사 선생님들 오면 가장먼저 혈압이다 뭐다 심지어는 외과선생님한테 구강검사까지 받더라니 까요.”
“아이고, 노인네가 지금도 정정하고만 얼마나 이 세상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그런데요?”
“누가 알겠어요. 아이고, 저기 오시네.”
할아버지의 시간은 정확했다. 늘 오전 6시에 일어나 30분간 맨손체조를 하고 7시에 아침을 드셨다. 할아버지의 시간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마치 할아버지의 생각처럼.
오늘도 어김없이 할아버지가 제일먼저 와계셨다.
“왜 이리 늦어! 어? 젊은 사람들이 이래 굼떠서야 어디다 쓰겄어?”
“아이고, 할아버님 나오셨어요? 오늘도 목소리가 쩌렁쩌렁 하시네~”
“퍼뜩 가지고 와봐라, 오늘은 어떤 놈이 왔나.”
“오늘은 아주 좋은 놈들로만 골라왔는데, 할아버님께서 가장 먼저 오셨으니까 가장 좋은 걸로 보여드리는 거예요.”
인삼이다. 좋은 놈으로 골라왔다던 남자의 말처럼 실하고 굵었다. 언뜻 보아도 값어치가 나가 보이는 삼이었다. 할아버지는 한 달에 한번 약장사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쫓아다녔다. 물론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할아버지의 이런 행동을 놓칠 리 없었다.
“어머, 이제는 인삼이네? 저 할아버지 200살까진 끄떡없겠어.”
“저번에도 인삼 좋은 걸로 하나 사가시는거 봤는데. 이번에 또 사가시네? 인삼주라도 담그시나? 자네가 한번 넌지시 물어봐봐. 어? 궁금하잖아.”
여자는 남자의 등을 떠밀면서 할아버지께로 보냈다.
“아, 할아버지 나오셨어요? 오늘은 와, 인삼 좋네요.”
“그렇지? 일찍 나오길 잘했어 아주. 좋은 놈으로 골랐네.”
“그런데 할아버님은 어떻게 이렇게 정정하세요? 이게 다 인삼 덕분인가 봐요?”
“내가 먹을 거 아니여. 우리 아들 줄 것이지.”
“아드님이요? 아니 아직까지 의사 아드님 몸보신까지 신경 쓰시는 거예요?”
“하이고, 의사는 무슨 의사. 내 소원이 뭔지 아나. 그저 아들보다 딱 하루 더 오래 사는 거라. 몸에 좋다는 거 정신에 좋다는 거 다 먹여 보는 거지 뭐. 더 말하면 뭐하겄어.”
할아버지의 아들은 의대에 입학하고 나서 돌연 사고로 인해 장애판정을 받았다. 동네사람들은
할아버지가 매번 대학병원에 들락날락 하는 일이 아들을 만나러 가는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할아버지는 아들을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야 했기에 그 무게를 감당할 만큼의 체력이 필요했다.
할아버지는 괜한 푸념을 늘어놓았다며 씩씩한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할아버지의 뒷모습에서 아들의 그림자가 비췄다.
“피자, 햄버거, 치킨 이런 거 자극적이고 식욕당기지. 거기에 적당한 알코올까지 더해지면 더 좋고.” 남자는 비꼬듯 이야기한다. 남자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내뱉은 말이었다.
아내는 그렇게 이야기 하지 말라며 노여워했다.
“남의 새끼는 칼로리에 온갖 영양 다 계산해가면서 먹이고 정작 내 새끼는 피자, 햄버거, 자장면 이런 거나 먹이고. 이게 말이되? 어?”
남편은 그동안 꾹꾹 눌러 담은 분노를 아내의 얼굴을 향해 쏟아 붓기 시작했다. 아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간 지나온 일들을 단편적으로 본다면 남편이 던진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여자와 남자는 맞벌이 부부다. 남편은 대학병원 의사로 늘 병원 아니면 서제에 있었고 수술이 있을 때면 특히 더 예민하게 굴었다. 수술이 있고 늘 환자를 대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도 누구보다 심할 것이라는 걸 아는 아내였기에 아내도 그동안 남편에게 잔소리 한번 심하게 하지 않았다.
아내는 학교에서 아이들 영양식단을 책임지는 영양사로 근무하고 있다. 아내는 누구보다 체계적이고 영양이 가득한 음식플랜을 짰다. 아내가 짠 음식대로 조리되어 나오는 음식들을 학생들은 남김없이 먹었다. 키가 크고 뼈가 튼튼해질 수 있는 친환경 유기농 영양만점 식단이었기에.
끝내 아내는 눈물을 보였다. 남편은 아내가 울고 있는 줄 알면서도 모른척했다. 아내를 달래줄 마음이 당시에는 조금도 들지 않아서 일 것이다.
식탁에는 이미 시킨 지 오래되어 퉁퉁 불어터진 자장면이 놓여있었고 자장면을 사이에 두고 남편과 아내는 식탁의 각각 모서리에서 뾰족한 모서리보다 더 뾰족한 말들을 주고받았다.
몇 달 전부터 학교급식의 안전과 영양실태에 대한 감시가 심해지면서부터 아내는 더욱 꼼꼼하게 영양식단을 짜야했다. 그러면서 아이에게 신경을 덜 쓰기 시작했고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에 집에 갈 때 뭐 사갈까? 라고 한 말이 시작이었다. 그러면서 의례적으로 저녁은 할머니한테 먹고 싶은 거 시켜달라고 하라고 말하던 아내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여전히 아내는 훌쩍였고 자장면 그릇을 가지러 온 배달부의 초인종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렸다. 남편은 진료일정을 미루고 아이와 함께 여행을 다녀오자고 말했다. 그러니 아내에게도 학교 일정을 조율하라고 말했다. 아내도 알겠다고 수긍했다.
그렇게 떠난 곳은 완주. 완주에 도착하니 와일드 푸드 체험이라는 것이 진행되고 있었다. 모처럼의 여행이라 그런지 아이는 신이 났고 계곡에서 물고기를 잡아 끓여 먹어보기도 하고 잠자리채로 곤충들을 채집하고 튀겨먹어 보기도 하며 모처럼 가족 같은 분위기를 냈다.
아내는 아이와 남편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덩달아 기분도 좋아졌다. 남편과 아이를 위해 저녁상을 준비했다. 남편이 잡아온 물고기에 소면을 넣어 끓인 철렵국을 만들기로 했다.
‘아!’ 외마디 비명이 차마 목구멍으로 나오지 못하고 턱밑에서 머물렀다. 다행히 뜨거운 뚝배기 그릇을 들고 있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가벼운 국자가 아내의 손에서 툭 하고 떨어졌다. 아내는 얼마 전 손목이 시큰거리며 가끔 끊어질 듯한 고통을 호소하며 정형외과를 찾은 적이 있다. 의사는 직업으로 인해 온 질병으로 진단을 했고 아내는 며칠 째 음식을 하는 것도 무거운 그릇을 드는 것도 벅차했었다.
남자는 떨어진 국자를 집어 들었다. 남자는 순간 의사의 직감이었는지 아내에 대한 마음이었는지 아내의 손목에 이상이 있음을 감지했다.
“왜 그동안 말하지 않았어. 의사 남편 두고도 써먹지도 못하냐, 바보같이.
내일 우리 병원에 와, 다시 검사받자.
그리고 이렇게 무거운 국자는 내게 줘. 철렵국은 내가 끓이는 게 훨씬 맛있다고.”
“이렇게 나오니까 좋다. 공기도 좋고 이곳에서 나는 음식들로 바로 요리하고. 영양이고 식단이고 따로 짤 필요가 없네. 여기 내려와서 살까?” 아내는 웃으며 말한다.
한가로운 오후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 언젠가 가야 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직접 받아보니 기분이 묘하다. 언젠가 입영통지서를 받으면 부모님께 호들갑을 떨며 알리고 친구들에게 진짜 사나이가 된다며 자랑을 늘어놓을 것만 같았으나 막상 받아보니 조심스럽다. 일단은 책상서랍에 넣어둔다.
머리를 먼저 깎아야하나, 어떻게 기른 머리카락인데. 아니다. 여자 친구에게 말해야 하나 고민된다. 헤어지자고 하면 어쩌나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대한민국 남자라면 국방의 의무는 당연하건만 새삼 우리나라가 전시중임을 깨닫는다. 분단 그리고 전쟁 상황이라는 것. 그리고 나라와 국민을 지켜야 한다는 것. 이맘때 남자들도 이런 기분일까? 괜스레 이등병의 편지를 흥얼거려본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뭉클하다.
한 달 남짓의 시간이 남았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고민된다. 문득 옛날 강원도 철원에 갔었던 생각이 난다. 유난히 군부대가 많았던 곳. 차가운 바람이 서늘하게 감돌지만 따뜻했던 곳이 철원이다.
철원 땅을 밟았을 때 서늘하지만 맑은 바람을 스읍하고 마셔보았다. 상쾌하다. 머리를 짧게 자른다면 조금 추웠을 날씨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엔 더 없이 좋은 날씨였다. 나는 유원지에 놀러 가면 재미삼아 소총으로 인형을 맞추어 보곤 했다. 그런데 이제 얼마 남지 않아 실제 총을 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다시 찾은 철원은 여전히 고요했다. 물이 흘러가는 소리 그리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곳은 수십 년 전 총성으로 가득했던 곳. 지금도 그 기운이 남아있는 곳이지만 총성의 여운보다는 그리움과 안타까움의 물결이 번지는 곳이기도 하다.
철의삼각전적지관광사업소를 시작으로 안보관광을 떠났다. 두 번째로 들린 곳은 제2땅굴로 한국군 초병이 경계 근무를 서던 도중 땅속에서 울리는 폭음을 듣고 굴착 끝에 발견한 땅굴이었다. 북한의 기습 남침용 지하 땅굴로 땅굴을 살펴보니 앞으로 군 생활을 미리 만나보는
세 번째로 들른 곳은 철원 평화전망대였다. 남북의 그리운 석별의 정이 녹아있는 평화전망대는 북녘 땅의 북한군 초소를 볼 수 있으며 철새들의 쉼터가 되어주는 토교저수지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새들은 자유롭게 남과 북을 오고갈 수 있겠지라고 생각해본다.
남자가 군대를 다녀오면 왜 진짜 사나이가 되었다고 말할까 생각해본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해 묵묵히 시간을 보내기 때문일까. 아니면 모르는 사람이지만 국민이라는 이유로 목숨 바쳐 훈련하고 전투를 하기 때문일까.
철원에서 다시 서울로 내려오는 기차에 올라탔다. 기차에 올라타고 잠시 생각해본다. 이 기차가 마지막으로 본 월정리역에 있던 기차라면 어떨까. 만약 정말 이 기차가 서울행이 아닌 저 북쪽의 어딘 가라면.
힘찬 경적소리가 울리고 기차가 움직였다. 눈을 감았다. 오롯이 기차의 움직임만을 느꼈다.
어디로 가는지 뻔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고 방향을 생각하니 뒤로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다.
짙은 풀색의 비니를 벗고 머리를 매만져본다. 까끌까끌하다.
집에 도착한 나는 식탁에 입영통지서를 올려놓았다.
사람들 발만 보고 있어도 현기증이 올라왔다. 대전역 1번 출구는 사람들로 붐볐다.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옮겨가고 있어서 그런지 반소매를 입고 있는 사람부터 가벼운 카디건을 입은 사람까지 통일감이라곤 없어서 더욱 북적임이 심했다.
현영은 1번 출구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가 생각보다 늦어지자 초조한 마음에 한쪽다리를 살짝 떨고 있었다. 애꿎은 휴대전화 버튼만 켰다 껐다를 반복했다. 그런데 멀리서 할아버지 한분이 같은자리에서 두리번거리며 무엇인가를 찾는 것 같았다. 도와드릴까? 괜히 끼어드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순간에도 할아버지는 계속 1번 출구 주변만 두리번거렸다. 할아버지 옆에는 8살쯤으로 보이는 꼬마아이도 보였다. 옆에서 할아버지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사람들의 빠른 발걸음에 도무지 신경을 집중할 수 없는 듯 보였다.
안되겠다 싶어 할아버지께로 다가갔다.
“저기. 할아버지. 어디 찾으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 고맙네. 한밭교육박물관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되는지 모르겠네. 몇 번 가본 적이 있는데 오늘따라 길을 자꾸 헤매네, 허허”
할아버지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옆에 꼬마 아이는 할아버지 옆에 꼭 붙어서 눈만 깜박일 뿐이었다.
“아, 한밭교육박물관이요? 여기에서 가까워요. 이 근처에요. 여기에서 가셔도 되고, 3번 출구로 나가시면 더 가깝고요.”
“아 그런가? 고맙네, 고마워.”
할아버지는 서양영화에서나 등장하는 중후한 노년의 신사 모습이었다. 어쩐지 박물관과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꼬마아이는 할아버지의 손주였을 것이고 주말을 이용해서 아이와 박물관 나들이를 하시려는 듯했다.
한밭이라. 대전에 쭉 살면서도 한밭이라는 단어는 언제 들어도 참 생소했다. 최근에는 한밭대학교나 한밭수목원, 한밭야구장까지 대전이라는 지명을 한밭이라는 옛 지명으로 바뀌어가고 있음에도 약간의 시대적 이질감이랄까? 그런데 아까 만난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한밭이라는 단어는 참 정감 있었다. 할아버지와 잘 어울린달까?
현영이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친구가 도착했다. 늦어서 미안하다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친구는 오늘 약속시간에 늦은 대가로 오늘 현영이 하자는 것에 군말 없이 따른다고 했다. 현영은 잠시 고민하더니 친구에게 뜻밖의 장소에 가자고 했다.
한밭교육박물관이었다. 지금 그곳에 간다면 아까 마주친 할아버지와 꼬마아이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박물관? 무슨 황금 같은 주말에 박물관이야~ 우리가 무슨 열혈 초등생이니?”
“방금 전에 내가 하자고 하는 거 군말 없이 따른다며! 그리고 원래 배움에는 끝이 없는 거야!”
친구의 팔을 잡아당기다시피 하여 도착한 한밭교육박물관.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많았지만 역 근처처럼 복잡한 느낌은 아니었다. 정돈된 느낌이 가지런해 보이기까지 했다. 한밭이라는 느낌과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꼬마가 있는 그림이 썩 잘 어울리는 곳이기도 했다.
많은 꼬마손님들이 갖가지 민속체험을 하며 하하 호호 웃음소리를 냈다. 전시공간에는 교과서에서만 보던 책들이 있었다. 현영은 전시를 구경하며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까 만난 할아버지와 꼬마아이를 찾는 중이었다.
‘벌써 가셨나? 아쉽네.’
현영이 관람을 마친 뒤 뒤돌아 나가려는데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할아버지와 꼬마아이 모습이 보였다.
현영은 빙그레 웃었고 마음 한켠이 따뜻해졌다.
“유코, 여기야!”
공항에서 부르는 일본 이름이 조금 낯설었다. 몇 년 전부터 펜팔을 주고받아 오던 일본인 친구가 드디어 한국 땅을 밟게 된 것이다. 유코는 상기된 표정으로 내 쪽으로 다가왔다. 둥근 얼굴에 긴 머리를 가진 유코는 내 예상처럼 키가 작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일본 소녀였다.
“안녕, 미주. 만나고 싶었어. 나는 한국을 많이 좋아해.”
이번 여행을 위해 한국어를 많이 공부했다는 유코가 더듬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나는 유코를 꼭 안아 주었다.
공항을 떠나 우리 집이 있는 강북 쪽으로 향했다. 한국은 물론이고, 외국에 나와 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는 유코는 많이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 편지에서 ‘한국인들은 일본인을 많이 싫어하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그것을 신경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유코를 데리고 어디로 가장 먼저 갈까 고민하다가, 유코가 ‘쇼핑을 가장 좋아한다.’고 썼던 것을 기억해냈다. 아무래도 문화재 같은 것들을 먼저 보여주는 것 보다는 즐거운 분위기에서 긴장을 풀어주는 것이 급선무일 것 같았다. 어디가 좋을까 생각하다가, 외국인들이 쇼핑을 위해 많이 찾는 명동을 떠올렸다.
“일본의 하라주쿠 같은 곳이 있는데, 한 번 가 볼래?”
유코는 자신의 친구들도 한국에 왔을 때 명동에 가 보았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동의 거리는 여느 때처럼 북적이고 있었다. 유코는 내 팔을 꼭 잡고 걸었다. 친구들과 왔을 때는 몰랐는데, 유코와 함께 걸으며 살펴보니 여기저기서 일본어와 중국어로 말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유코도 일본어로 말하는 사람들과 일본어로 된 안내판이 적혀 있는 것들을 보고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옷이나 화장품들을 사며 명동을 활보하는 동안, 유코의 긴장도 많이 풀린 것 같았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유코는 명동 거리에서 느껴지는 젊음이 마음에 쏙 든 모양이었다. 호객인들 몇이 유코가 일본인인 것을 알아채고 다가와 말을 걸자 웃는 얼굴로 대답을 하기도 했다. 중국어로 말을 걸었다가도, 유코가 입을 열자마자 일본어로 다시 말을 걸었다. 우연히도 우리가 들어간 음식점의 종업원도 일본인이기에, 이제 유코는 자신감을 조금 되찾은 것 같았다.
정말 외국인들이 많이 오긴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유코가 웃으며 말을 꺼냈다.
“미주, 여기 사람들은 모두 친절한 것 같아. 나는 한국에 오면 한국어만 써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여기 사람들은 일본어도 잘해. 신기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
일본어와 한국어가 반쯤 섞인 유코의 말을 듣고, 나도 조금 뿌듯해졌다. 예전에 중국으로 여행을 갔을 때, 한국인과 한국어로 쓰인 호객 문구들을 보고 반가웠던 것과 같은 기분일까. 낯선 땅에 와서 혹시나 길을 잃거나 사기를 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많았는데, 한국인들이 많이 다녀가는 곳이다 보니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중국 상인들도 많았고, 모두 한국인을 친절하게 대해줘서 정말 고마웠던 기억이 났다. 전에는 느끼지 못했었는데, 외국인 관광객들을 가장 많이 배려하는 곳이 바로 명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명동의 필수 코스, 회오리감자와 노점상 식혜까지 먹은 뒤 숨을 좀 고를 겸 번화가를 벗어나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해가 넘어갈 무렵이라, 명동성당의 멋진 야경을 보여주기에 딱 좋은 시간이었다. 유코는 성당의 규모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건물을 한 바퀴 둘러보고 있자니 여기저기서 아름다운 조명이 켜지기 시작했다.
그 때, 유코가 저 멀리서 한 무리의 불빛이 일렁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봉헌초였다. 유코와 나도 촛불을 하나씩 켜 보았다.
“한국의 밤은 정말 아름다운 것 같아.”
초를 밝히고 돌아서는데, 이번에는 건물 너머로 남산타워가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것들을 보여줄 수 있어 다행이었다. 내가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유코가 먼저 벤치에 걸터앉아 남산타워를 올려다보았다. 미소를 띠고 있는 유코의 옆얼굴을 보며, 나도 따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