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두 해에 걸쳐 한 번씩은 꼭 떠나는 부산여행이지만, 이번 여행길은 특별하다. 해수욕장에 가는 대신, 해운대와 광안대교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이기대의 해파랑길과 갈맷길을 걸어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 낮이면 온종일 해수욕을 즐기고 밤이 되면 센텀시티의 찬란한 야경을 보며 술을 마시는 것을 부산 여행의 묘미로 삼던 나였는데, 이번에는 아내가 다른 모임에 가는 바람에 아들이 동행으로 붙어버린 것이다. 모처럼 혼자 떠나는 여행인지라 카메라를 챙겨 들고 여유를 즐겨 볼까 했는데, 다 틀렸다.
그래도 내 아들인데 어쩌겠는가. 아직 어린 아들은 빨리 바닷가에 수영을 하러 가자고 끝도 없이 칭얼거릴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이기대를 걸으며 들려 줄 이야기들을 미리 준비했는데, 이기대를 걸으며 전해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들까지 합하니 이야기의 규모가 꽤 크다. 기억 속에 그냥 남겨 두기가 아까워, 그것을 이 자리에 풀어 놓아 보고자 한다.
하나, 이기대의 이기(二妓)란, 두 명의 기생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야기 흐르는 대로’ 걸을 수 있는 곳이라 이기대라며 첫 운을 뗄 생각이었던 내게는 아주 맥 빠지는 내용이었는데, 내 멋대로 해석해 보기는 물 건너갔지만, 이 전설이 꽤나 재미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쳐들어와 이곳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를 열었는데, 이곳에 불려갔던 기생 두 명이 왜장에게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한 후 왜장을 안고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때문에 의로운 기생들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이라 하여, 의기대(義妓臺)라고 부르던 것이 조금 더 알아듣기 쉬운 이기대로 바뀌었다 한다. 논개에 이어, 이기대에서도 왜장을 안고 투신한 기생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으니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이곳 어딘가에 이 의로운 기생들의 두 무덤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도 내려오니, 이 무덤들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둘, 구천만 년 전에는 공룡도 이 길을 걸었다.
절벽과 절벽 사이를 가로지른 구름다리를 건너가다 보면 커다란 물웅덩이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공룡의 발자국이라고 한다. 무려 구천만 년 전의 백악기에 울트라사우르스라는 이름의 거대한 초식 공룡이 이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초여름이라 공룡 발자국 안에는 수십 마리의 올챙이들이 살고 있었는데, 공룡 발자국 안에서 자라 개구리까지 된 녀석들을 보고 있자니 새로운 이야기들을 마구 써 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근처에서 황동이 생산되기도 했다고도 하고, 동굴체험을 할 수 있는 곳도 있다. 몇 년 전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 <해운대>에서 이기대라는 이름의 어원까지 속 시원하게 언급된 지금이야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곳이 되었지만, 이 아름다운 곳이 크게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군사지역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캐면 캘수록 과거의 이야기가 흘러나오니, 과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이라는 별칭이 어울리는 곳이다. 이렇게 숨은 이야기가 많은 지라 길 가다 만난 현지인들은 모두 훌륭한 이야기꾼이다.
셋, 오륙도의 새하얀 섬은 사실 가마우지의 배설물로 덮인 섬이다.
다섯 개의 구름다리를 건너 오륙도가 내다보이는 곳까지 이르렀다. 산책길이라고 하기에는 꽤나 험난한 길이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마다 오륙도의 섬 개수를 세어 보고 있다. 날이 맑아 오늘은 여섯 개의 섬이 모두 잘 보였다.
낚시를 좋아하는 나는 오륙도 인근까지 배를 타고 나가 본 일이 있는데, 아름다운 섬들 중에서도 설산처럼 하얀 굴섬에 매료되었었다. 그런데 ‘섬이 하얀 게 참 예쁘다’는 말을 하자마자 뱃사람 한 명이 웃음을 터뜨리며, ‘저게 다 가마우지의 똥’이라는 말을 했었다. 결과적으로는 이 천연 거름 덕택에 굴섬 주변에 훌륭한 천연 어장이 형성되었지만, 그 때의 충격과 창피함을 어찌 설명할 수 있으랴.
슬쩍 아들의 얼굴을 쳐다보니, 눈이 초롱초롱한 것이 이기대가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공룡 이야기에서부터 얼굴을 펴기 시작하더니, 가마우지 똥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아주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던 것이다. 아들의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밥 좀 먹으러 시내로 나갈까?”
“아니, 나 아까 해녀 아줌마가 팔던 거 그거 먹을 거야!”
기특한 일이었다. 나는 아들의 손을 꼭 붙잡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해녀막사 앞의 난장에 멍게가 아주 싱싱하던 것이 떠올라 군침이 꿀꺽 꿀꺽 넘어갔다. 구천만 년 후의 이기대에서는 나와 우리 아들의 발자국이 발견되기를 바라며, 짧은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