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내포(內浦)를 ‘충청도에서 가장 좋은 땅’이라 기록한다. ‘안쪽 바다’라는 뜻을 지닌 내포는 가야산을 중심으로 한 충남 서북부 지역을 가리킨다. 당진과 서산, 보령, 홍성, 예산 등이 여기에 속한다. 내포 지방은 예부터 바닷물이 육지 안쪽까지 들어와 포구를 이뤘던 곳으로, 교통이 발달하여 자유롭게 왕래하는 배들이 많았다. 이 때문에 외부와의 교류가 활발하였으며,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중국으로부터 가톨릭 문화가 유입된다. 19세기에 이르러 내포 일대는 100가구 중 80가구 가 천주교를 믿을 정도로 교세가 커지는데, 이때부터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다. 내포 지역은 한국의 4대 천주교 박해로 꼽히는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병인박해(1866)를 모두 겪으며 한국 천주교의 아픈 역사를 대변하는 순교자의 땅이 된다.
'당진 솔뫼성지'는 지난해(2014) 8월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다녀가며 더욱 큰 주목을 받게 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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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뫼성지 입구에 김대건 신부의 탄생을 알리는 표지석이 놓여 있다.2
솔뫼는 '소나무로 이루어진 산'이라는 뜻으로 실제로 많은 소나무들이 심어져 있다.한국 천주교의 성지로서 순례자 사이에서나 이름이 나 있었던 솔뫼성지가 일반인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은 지난해인 2014년 8월의 일이다. 25년 만에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며 솔뫼성지에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내포 지역 한 가운데 위치한 솔뫼는 ‘소나무로 이루어진 산’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솔뫼 출신이다. 솔뫼는 한국 천주교 역사상 가장 많은 신자들을 배출하는 한편,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낳은 곳이기도 하다.
김대건 신부가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게 된 것은 그의 나이 열일곱, 만으로 열다섯 살 때다. 다산 정약용의 조카인 정하상이 프랑스 출신의 모방 신부에게 그를 추천하면서, 최양업, 최방제 등과 함께 마카오의 파리외 방전교회에서 사제 수업을 받게 된다. 이후 1844년 부제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는 이듬해인 1845년 중국 상하이의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는다. 우리나라 최초로 가톨릭 신부는 그렇게 탄생했다. 동기였던 최양업은 1849년 사제서품을 받음으로써 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가 되었고, 최방제는 마카오에서 공부하던 중 병사한다.
한편, 김대건 신부의 집안은 4대에 걸쳐 무려 열한 명의 순교자를 냈다. 증조부 김진후는 벼슬을 버리고 50세의 나이에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하다가 1791년 서산의 해미읍성에서 옥사했다. 숙조부 김종한은 대구에서, 아버지 김제준은 서울 서소문 밖에서 각각 순교했다. 김대건 신부는 1845년 귀국 후 선교활동에 힘쓰다 사제 생활 1년 1개월 만인 1846년 9월 스물여섯의 나이로 옥사하는데,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때 비로소 성인 품위에 오르게 된다.
한국의 베들레헴, 김대건 신부의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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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2
기념 성당 앞쪽에 설치된 대형 목조 십자가가 눈길을 끈다.솔뫼성지의 모태가 된 김대건 신부의 생가는 ‘한국의 베들레헴’으로 통한다. 1906년 합덕성당의 크렘프 신부가 토지를 매입하는 등 성역화를 위한 초석을 다졌고, 1973년부터 본격적인 성역화 사업이 시작돼 2004년 지금의 자리에 솔뫼성지가 들어선다. 그동안은 국내 가톨릭 순례자들이 찾는 성지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으로 세계적인 가톨릭 성지로서 주목받고 있다.
솔뫼성지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자그마한 한옥 한 채가 보인다. 김대건 신부를 추모하고 가톨릭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그가 살았던 옛집을 그대로 복원했다. 생가 앞에서는 솔뫼성지를 찾은 순례객들이 기도를 드리는 광경을 쉽게 목격할 수 있는데,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이곳에서 김 신부의 영정에 꽃을 바치고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한편, 생가 왼편으로는 오래된 노송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면적만 1만 평에 이르는 규모다. 이 소나무 숲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동상과 순교복자비, 성인비가 함께 모셔져 있다.
김대건 신부를 기리고 가톨릭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만든 기념 성당과 기념관 건물이다.
한편, 소나무 숲 사이 길을 따라 내려가면 붉은색 건물이 보인다. 김대건 신부를 기리는 기념 성당과 기념관이다. 김대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탔던 라파엘호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건축한 건물이다. 기념 성당에는 약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미사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전시관에는 충청 지방의 가톨릭 역사를 비롯한 김대건 신부의 유품과 유골이 전시돼 있다.
성당 맞은편에 있는 솔뫼 아레나는 원형공연장과 야외 성당을 겸한다. 김대건 신부와 동료 밀사들이 새남터 모래사장에서 순교한 것을 기리기 위하여 모래 혹은 모래사장을 의미하는 ‘아레나’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레나 주위로는 예수의 열두 제자 조각상이 둘러싸고 있다. 이곳에서는 각종 음악회와 연극 등의 문화공연과 야외 미사 등이 수시로 열리며, 약 3천 명 정도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다. 이밖에도 솔뫼성지에는 대형 목조 십자가상, 십자가의 길 등이 조성되어 있다.
솔뫼성지와 이웃한 합덕성당과 신리성지
합덕성당의 쌍탑은 이국적이면서도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낸다.
솔뫼성지에 들른 후 이웃한 합덕성당과 신리성지도 함께 둘러보면 좋다. 합덕성당은 천주교 박해가 끝난 1890년 내포 지역에 처음 세워진 성당이다. 본래 한옥 형태의 성당이었으나 1929년 7대 주임인 페랭 신부가 벽돌조의 고딕 성당을 신축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입구에 있는 계단을 통해 언덕을 오르면 합덕성당의 붉은색 벽돌이 보인다.
정면의 종탑이 여타 성당과는 달리 쌍탑으로 되어 있어 이채로우면서도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합덕성당에서 30년간 주임 신부로 활동한 프랑스 선교사 페랭 신부는 한국전쟁 당시 홀로 성당에 남아있다 북한군에 의해 납치되어 피살됐다. 성당 옆에는 페랭 신부의 유해 대신 유물이 묻힌 묘소가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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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리성지에는 손자선의 생가이자 성 다블뤼 주교의 주교관인 초가가 복원되어 있다.2
신리성지의 기념 성당은 현대식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것이 특징이다.또 박해기 조선에서 가장 큰 교우촌이었다고 전해지는 신리성지도 천주교 성지로서 가볼만한 곳이다. 1865년 위앵 신부가 신리에 들어왔을 당시, 마을에 살던 400여 명의 주민 모두가 천주교 신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1986년 병인박해 때 위앵 신부를 비롯한 신자 42명이 순교하는 등 마을이 초토화되어 교우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드넓은 평야 한가운데 조성된 신리 성지에는 조선교구 5대 교구장인 다블뤼 주교의 동상과 기념관, 기념 성당, 성인의 반열에 오른 손자선의 생가 등이 있다. 이중 2004년 복원된 손자선 생가는 다블뤼 주교의 주교관이자 조선 교구청으로 사용된 바 있다. 한편, 다블뤼 교주는 한국 가톨릭 역사에 있어 큰 족적을 남긴 것으로 유명한데, 한글 교리서를 저술·간행하는가 하면 조선교회의 역사와 순교사를 정리하여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스페인에 산티아고 순례길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내포 순례길이 존재하는데요. 특히 당진에 위치한 솔뫼성지, 합덕성당, 신리성지는 우리나라 천주교의 살아있는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랍니다.
글 트래블투데이 심성자 취재기자
발행2021년 08월 19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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